자매에게,

네 안부부터 물어야겠어. 아침에 눈을 뜨면 폭설과 추위를 알리는 안전 안내 문자가 기다리는 매일인데, 너는 따뜻한 곳에서 널 잘 돌보고 있는 거지? 게다가 때로는 바깥이 떠들썩할수록 안쪽의 고요가 들끓기도 하잖아. 어느덧 찾아온 한해의 마지막이 버거워 혹시 그저 빨리 달력을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

매달 쓰던 이 편지를 한동안 멈출 예정이라서, 더 애틋하게 널 걱정하게 돼. 잔소리처럼 들리더라도 어쩔 수 없어. 2023년에도 네 몸과 마음을 먼저 돌보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자매들을 찾고, 가끔은 도망치더라도 너 자신을 잃을 만큼 멀리 가지는 마. 나와 약속해야 해.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코끝이 시리도록 춥지만, 그래도 보일러를 최대한 높인 채 이불로 덮인 탁자의 온기 속에서 상반신만 꺼내놓고 편지를 쓰고 있어. 옆에는 새콤달콤한 귤을 잔뜩 쌓아두었고, 얼마 안 있으면 친구들이 연말을 기념하는 파티를 위해 들이닥칠 거야. 너에게 이 풍요로움을 쪼개서 나누어줄 방법을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을 정도야.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아, 내 입안에서 울렁거리는 어떤 단어가 아니라면,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뱉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라는 단어 말이야.

네게 마지막으로 읽어줄 책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골랐어. 초록색 표지까지도 얼핏 크리스마스의 전나무를 닮은 이 시집만큼 12월에 어울리는 책은 없을 것 같았거든.

"전쟁으로 얻은 우리의 전리품, 그건 세상에 대한 깨달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크다는 것,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특별하다는 것."

-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p.11

자매에게,

1923년에 태어난 시인은 나치 독일이 모국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의 막이 오르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지만, 우리에게도 전쟁은 그렇게 먼 얘기는 아니지.

올해 2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연말이 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이란에서 ‘여성, 삶, 자유’를 외치는 반정부 시위가 100일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려 와. 게다가 편지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북한이 날린 무인기가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네.

그리고 이번 달 초 보신각 앞에서 ‘페미사이드를 멈춰라’라고 외친 여자들의 목소리까지, 우리는 적어도 비유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해. 여자로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이 투쟁을 나는 실제 전쟁만큼 엄중하게 받아들여 왔으니까.

이 전쟁에도 끝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상상하던 끝은 전 세계 구석구석의 어떤 여자도 자기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 세상, 여자가 직접적인 위협도 은근한 억압도 없이 수많은 양질의 선택지 속에서 여태 없던 길을 만들어나가는 미래였어.

어떤 낙관적인 가혹함으로, 나는 그 끝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어. 마치 내 생애 동안 그게 가능하기나 할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쉼보르스카를 읽으면서는 모든 명분을 달성하고 끝나는 전쟁은 없다는 역사적 이치를 깨닫게 돼.

우리는 어느 순간엔 “전리품”을 안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건 출전하며 꿈꿨던 보상에는 절대 미치지 못할 거야. 현실은 360도를 돈 제자리처럼 보이고, 우리가 얻은 건 고작 “세상에 대한 깨달음”에 불과한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이제 자매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을 통해 거대한 세상을 바라볼 줄 알고, 이 부조리를 힘껏 깔깔 비웃으며 즐거워할 줄 알고, 한때 그저 케케묵은 옳은 말이라 여겼던 페미니즘의 선언을 가슴에 새길 줄 알아.

그리고 너도 한 해 한 해를 보내며 이렇게 작지만 귀중한 전리품을 쥐었을 거라고 믿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p.315

자매에게,

표제시 <끝과 시작>은 전쟁이 끝난 곳에서 시작해. 그러니까 총성이 가시고, 언론들은 흥미를 잃고 다른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게 되었을 때, 그때야 시작될 일상적 빗자루질에서 말이야.

시가 다루고 있는 재건과 회복, 망각은 무언가의 시작이라고 보기엔 시시하지. 팡파르도 기념관도 없어. 우리의 전쟁터가 없던 일처럼 풀로 덮여버린다니 쓸쓸한 느낌마저 들어.

그럼에도 열두 달을 꽉 채운 이 편지를 마무리 지을 용기를 준 것도 이 시집이었어.

밑천이 변변찮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거의 다 했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위안일 지도 모르는 편지를 막상 멈추기는 머뭇거려졌었거든. 내 자신이 전쟁이 한창일 때 전우들을 두고 도망가는 변절자 같아서.

내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정해진 상태였다면 그만두기가 더 쉬웠을 거야. 앞으로 두 번째 책을 쓸 거라던지, 번역할 책을 계약했다던지, 나는 멈추는 게 아니라 더 열심히 달릴 거라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솔직히 말하면,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겠어. 잠시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 이삭을 입에 문 채 /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뿐이야.

끝은 무언가의 시작이라고들 하지. 그러나 가장 간단한 단어로 웅대한 진리를 포착하는 쉼보르스카가 말하듯이(그리고 내가 살아본 결과), 무엇이 시작되는지 알고서 끝을 맺을 수는 없는 것 같아.

편지를 쓰며 올해 3월의 일기를 다시 읽었어. 연애 상대에게 푹 빠진 친구에게 자신의 미래를 딴 사람과의 관계 위에 세우지 말라고 조언해놓고선, 고민에 빠졌었거든. 하지만 거기가 아니라면 미래는 대체 어디에 세워야 하는 걸까? 나는 답을 이렇게 적어냈더라고.

"아마도 한쪽 다리를 든 학 자세처럼, 나 자신의 균형 위에. 나를 둘러싼 세계에 온몸을 던지면 어떤 그물망에는 걸리기 마련이라는 믿음 위에."

나는 다시 그물망 위로 온몸을 던져보려고 해. (가닥이 잡히면 예상보다 빨리 불쑥 돌아올지도 몰라.)

한해 동안 내가 썼던 편지들이 주머니 속 손난로만큼은 따듯했기를 바라. 다시 만날 때까지 네가 진실되고, 건강하고, 여유롭길.

2022년의 마지막 날,

완전한 안녕은 없다고 믿는 혜담이.

추신 1.

이렇게 편지를 끝내면 아쉬우니까, 그동안 다루고 싶었지만 못 했던 자투리 이야기를 할 겸 올해를 정산해볼게.

올해의 구독

언니네텃밭 꾸러미. 여성농민들이 직접 농사 지은 먹거리를 꾸러미로 받아볼 수 있다고? 이건 못참지!

나는 원래도 농산품을 대량으로 사게 되면 네이버 산지직송에서 여성농민의 얼굴을 걸고 판매하는 상품들을 고르곤 했거든. 농촌의 성차별적 문화에 대해 들은 바가 많은 터라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언니네텃밭이라는 사이트를 알게 된 9월부터 매달 꾸러미를 시켜먹어 봤는데, 너무 만족스러워.

꾸러미 구성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데, 우유와 두부, 달걀 같은 기본 식재료와 함께 제철 농산품들이 딸려 와. 대부분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품질이 좋은 데다, 고추잎이나 비트처럼 낯선 식재료를 도전하듯 써보는 것도 너무 즐거웠어.

무엇보다 좋은 건 함께 보내주시는 편지! 왜 이 재료를 골랐는지, 어떻게 준비했는지, 어떻게 요리 해먹으면 맛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시거든. 농민 분들과 펜팔로 연결된 것처럼 마음이 따듯해져.

꼭 정기구독할 필요 없이 1회씩만 시켜볼 수도 있으니까, 너무 부담갖지 말고 한 번 시켜보는 건 어때?

올해의 무대

이영지 <WITCH>. 빨리감기를 하거나 배경으로 틀어둘 수 없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고정되는 느낌은 처음이었어.

“작은 소녀의 발전이 너의 앞길을 막아선다는 피해의식”이라는 벌스의 강렬함은 힙합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까?

영지가 내가 바로 그 마녀(the witch)라고 하지 않고, 여러 마녀 중 하나(a witch)라고 하는 것까지 다시 곱씹게 돼. 황소윤의 신비한 목소리는 화형대에 올려도 꺾을 수 없었던 여자들의 정신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올해의 막걸리

양주도가 별산 막걸리 / 배혜정도가 우곡생주.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 올해, 막걸리의 맛을 알아버렸어. 잘 만든 막걸리는 꼭꼭 씹은 쌀처럼 고소하게 달면서도 요거트처럼 부드럽다는 사실을!

막걸리는 아무리 비싸도 위스키나 와인에 비할 바는 아니라서 더 부담 없이 친구들과 나눠 먹을 수 있었어. 아주 특별한 날이면 기분 낼 겸 별산을, 일상적인 식사 자리에선 우곡생주를 곁들였지.

너무 맛있어서 찾아보니 별산막걸리를 개발한 김민지 양주도가 부대표도 여자였고, 우곡생주를 내놓은 배혜정도가의 배혜정 대표도 여자라서 더 운명적으로 느껴져.

술을 숙성하는 숙성조에 여자 연예인 이름을 붙였던 어느 맥주 업체의 예에서보듯, 양조 업계의 남성 중심 문화는 잘 알려져 있지. 그 틈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여자들에게 건배를!

올해의 책

<탈혼기>.

여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소개했지만, 뻔뻔하게 내가 쓴 책을 최고로 꼽아도 용서해주겠지?

나는 나에게 책 한 권이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믿었고, 이제 그 책은 누구에게도 건넬 수 있는 물리적 형태로 내 책꽂이에 꽂혀 있어. 그것만으로도 한 해를 잘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는 떡국용 떡과 다시팩, 달걀, 게맛살, 파, 참기름이 다야.

먼저 다시팩으로 육수를 우리는 동안, 게맛살을 결을 따라 잘게 찢어줘. 달걀은 휘휘 저어서 풀어놔.

육수가 우러나면 떡과 게맛살을 넣어. 떡이 충분히 말랑말랑해지고 국물을 보글보글 끓고 있을 때, 이 시점이 포인트야. 참기름과 잘 풀어둔 달걀을 빙 둘러붓고 바로 불을 꺼줘! 그래야만 달걀이 보들보들 부드럽게 녹아들거든.

이제 국자로 떠서 먹기만 하면 돼. 파를 다진 걸 올려먹으면 좀 더 상쾌할 거야. 중식당에서 나오는 달걀게살스프를 응용해봤는데, 떡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거 있지.

우리는 한 해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알지 못하지만, 떡국을 한 숟갈 뜨면 어떻게든 돌아갈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매년 먹어온 떡국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줬듯이 말이야. 

너와 한해의 끝과 시작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 언젠가, 어딘가에서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날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