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먼저 이 소식부터 전해야겠지. 한 달 동안은 불안했다가 벅찼다가 마음속으로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지만, 그래도 내 책 <탈혼기>가 목표 금액을 달성했어! 모두 응원해준 네 덕분이야. 혹시 후원을 깜빡 잊었다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늦지 않았어. 여기로 가면 아슬아슬하게 막차에 올라탈 수 있을 거야.

이번 달엔 꼭 네게 김향안이라는 여자에 관해 얘기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누군지 모른다고? 괜찮아, 나도 이번 달 초까지는 그랬거든.

반소매를 입었는데도 덥다 싶은 날씨는 올해 들어 처음이었어. 친구와 함께 한적한 부암동 주택가 사이로 야트막한 경사를 오르는데, 벌써 땀이 났어. 우리는 환기미술관을 관람하러 가는 중이었어. 난 친구 모르게 속으로만 걱정했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으면 어쩌지?’

<탈혼기> 출판을 앞두고 할 일은 쌓여있었지만, 한 달도 더 전에 예매해놓은 표를 취소할 수는 없었어. 친구도 나처럼 겨우 틈을 낸 걸 아는데 어떻게 그러겠어.

하지만 난 친구를 졸졸 따라온 것에 가까웠고, 미술관이 이름을 딴 남자 화가 김환기에 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어. 어느 경매에서 그림이 까마득한 금액에 낙찰됐다는 기사를 스쳐 가며 읽은 게 다였지. 그러니 내가 김향안을 알았을 리가 없잖아.

“근데 김향안이 누구야?”

친구가 표를 받아오는 동안 기프트샵을 둘러보다가 내가 발견한 낯선 이름이 김향안이었어. 나는 버릇처럼 어디서나 여자를 발견하곤 하거든. <월하의 마음>이라는 책은 어떤 설명도 없이 김향안 에세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표지의 흑백 사진 속에서는 이 책을 썼을 게 분명한 어떤 여자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안경 너머로 꿰뚫는 눈빛을 던졌어. 나는 사로잡히고 말았지.

김향안은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 친구에게도 낯선 이름이었으니, 아마 너도 처음 듣지 않을까 싶어. 우리는 책을 아무 데나 펼쳐서 같이 읽기 시작했어. 마침 펼쳐진 꼭지의 제목은 "화가의 아내"였고, 나는 그렇게 김환기보다도 먼저 김향안을 알게 되었어.

“이 과일들은 레몬이나 오렌지 같은 노란색 과일이오. 그 아름답고 찬란한 과일의 빛깔을 표현하고자 노란색을 가장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나타낼 수 있는 회색 빛깔의 바탕을 쓴 것이요, 봄과 희망을 상징해 달라는 귀사의 본의를 쫓아 아름다운 열매를 택한 것이오. 무수한 과일의 열매처럼 또 지상에서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 있으리까.” - <월하의 마음>, p.59

김향안이 잡지 표지에 실을 김환기의 그림을 가지고 잡지사를 방문했던 때였어. 향안은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잡지사의 남자 직원에게 이렇게 일갈하려 해. 그 그림을 안 봐도 알 수 있지 않아? 화가 본인조차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와 친구는 전시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고개를 들어야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김환기의 그림은 제주의 바다를 볼 때처럼 속이 훤히 트이는 기분이었어. 온라인에서 손바닥만 한 이미지로 볼 때와는 전혀 달랐지. 그림이 풍경 같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그런데 좀 재밌게도, 우리는 어느새 그림보다도 미술관을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어. 딱히 화려하지는 않았어. 그렇지만 공간의 세심한 설계와 배치와 분위기에 자꾸 눈이 갔어. 분명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틀’에 불과할 것인데,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라고 할 것인데, 왜일까. 그 ‘틀’이 아니었다면 그림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을 것 같은 거야.

너도 예상했겠지만, 그건 향안의 그림자였지. 그림은 김환기의 것이되, 공기 중에는 김환기가 죽고 나서도 환기재단을 진두지휘하며 미술관까지 세운 김향안의 의지가 감돌고 있었어. 그러다 흰 벽에 붙은 향안의 글에 도달한 친구와 나는 웃고 말았어.

“미술관은 내용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어놓아도 그 안에 아름다운 예술이 하나 가득 담아져 있지 않으면 미술관은 아무것도 아니다.” - <월하의 마음>, p.292

‘하지만 집이 이렇게 아름다운데도요?’

향안은 당연히 그 자리에 없었지만, 우리는 이런 반박을 조용히 주고받았어. 우리가 가장 오래 서서 감탄한 건 벽에 걸려 있는 어떤 그림이 아니라 빛이 새어 들어오는 색유리 창이었거든. 그런 걸 ‘비트라유’라고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얼핏 아무렇게나 그은 듯한 청록색 선이 자연광과 만나 오묘하게 빛났고, 그 옆에도 역시나 향안의 글이 적혀 있었어. 다른 어떤 그림도 아닌 그 그림을 선택해, 다른 어떤 형식도 아닌 비트라유로 만들어, 다른 어디도 아닌 그 자리에 놓은 건 향안이었지.

 “넌 예술이 뭐라고 생각해?”

너도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어? 문학 동아리를 했던 나에게 뒤풀이 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한 남자 선배들은 꼬인 혀로 그렇게 묻곤 했어. 그건 뭐라고 대답해도 함정인 질문이었지. 일단 정의를 하는 순간 고작 그런 틀에 예술을 끼워 맞추려는 사람이 되고 말거든.

나는 아직도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예술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면서 몇 가지 배운 건 있어. 어떤 천재적인 예술이라도 틀 안에서 존재해. 우리가 알맹이라고 부르는,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 작품이 독자를, 청중을, 관객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부수적’인 노동이 들어가. 아니, 난 그걸 부수적이라고 부르지 않을래. ‘맥락 노동’은 그러기엔 너무도 필수적이야.

이번 달에 나는 그런 ‘맥락 노동’을 아주 많이 해야 했어. <탈혼기>를 홍보하는 글을 쓰고, SNS에 업로드하고, 책을 소개하는 북 트레일러를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텀블벅 후원 현황을 관리하고, 인쇄소와 연락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탈자를 찾고, 파주로 가서 감리를 봤지. 사소하고도 지난한 일들의 연속이었어.

‘아니,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좀 그냥 봐주면 안 돼?’

그런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어. 하지만 내 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전달되려면, 끝까지 힘을 내야 한다는 걸 알았어.

게다가 향안의 이야기가 내 등을 떠밀고 있었지. 나는 너무도 향안이 궁금해진 채 미술관을 나왔고, 며칠 후엔 도서관에 가서 향안이 쓴 책 중 유일하게 절판되지 않은 <월하의 마음>을 빌렸거든. 읽을수록 향안의 ‘맥락 노동’ 실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어.

김환기에게 향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환기가 될 수 없었으리라는 건 알수록 명확해져. 김환기가 예술을 하는 동안 향안은 나머지 전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이 밖에 나는 또 가끔 손님을 청해다 대접도 해야 했고 화가를 동반하고 친지를 방문해야 했고 미술관 안내를 해야 했고 미술계 소식을 번역, 전달해야 했고 신문을 읽어 들려 주어야 했다.” - <월하의 마음>, p. 181

세계 무대에서 자기 위치가 궁금하다고 술주정을 하는 김환기에게 그럼 나가자고, 자기가 먼저 나가보겠다고 프랑스 파리로 이끈 것도 향안이었어. 다음날 바로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내 달랬대. 연도는 1955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전쟁까지 다 겪은 향안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지금처럼 유튜브로 볼 수도 없는 도시에, 간단한 앱으로 공부할 수도 없는 언어를 쓰는 곳에 어떻게 혼자 갈 엄두를 냈을까? 나는 상상이 잘 안 돼.

향안이 했던 나머지 일은 헤아릴 수도 없어. 신문에 <파리 기행> 칼럼을 연재해서건, 뉴욕 백화점에서 일해서건 생활비를 대고, 김환기가 죽은 후에도 그림을 관리하고, 화집을 내고, 재단을 만들고, 미술관을 부지 마련부터 건축까지 일일이 챙기고….

그래서 예술이 대체 무엇일까?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 묻게 돼.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부터는 예술이 아닐까? 김환기가 했던 일들은 예술인데 향안이 했던 일들은 예술이 아니라고,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확신하는 걸까?

그 선을 긋는 데 성별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내가 늘 했던 의심이었어. 남자가 하는 일까지가 예술이고 여자가 하는 일부터는 나머지가 된다고. 아니, 닭과 달걀의 순서를 따지자면 어떤 일이 나머지에 불과하다고 분류되자마자 그건 여자 차지가 되곤 한다고.

남자 예술가의 예술이 빛나도록 일생을 바친 ‘아내’는 그 수를 다 셀 수도 없잖아. 대문호로 불리는 톨스토이와 결혼했던 소피아 안드레예브나는 남편의 갈겨쓴 손글씨를 또박또박 다시 적으며 교정 교열을 보고 출판사와 소통하고 남편의 작품을 다른 언어로 번역했어.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피아를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아. ‘악처’라고 부르지.

‘악처’는 아무리 지긋지긋해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만큼 유능했던 여자들의 이름이야. 모차르트와 결혼했던 콘스탄체는 남편이 죽고 나서 추모 콘서트를 개최하고 악보를 출판하고 전기를 쓰는 데 일생을 바쳤어. 그런 소피아와 콘스탄체를 후대의 남자 연구자들이 왜 ‘악처’로 몰았냐고?

“우리 시대 전까지 역사는 남자의 성취에 집중했다. 성취가 크면 클수록 그 남자와 한 이불을 덮는 여자는 남자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평가됐다. 남편의 추종자들은 남자의 위대한 성취에 여자가 이바지했다는 말만 나와도 치를 떨었다. 그렇게 숭배하는 영웅과 자기는 꿈도 못 꿀 만큼 가까웠던 여자, 아무리 노력해도 못 따라갈 만큼 그를 이해했던 ‘아내’가 존재할 가능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Germaine Greer, Shakespeare’s Wife

호주의 페미니스트 학자 저메인 그리어가 <셰익스피어의 아내>라는 책에서 이미 잘 분석해두었어. 셰익스피어와 결혼했던 앤 해서웨이도 별 근거가 없이 ‘악처’로 몰려온 여자 중 하나거든. 누가 알겠어? 앤 해서웨이도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대사를 써줬을지. 그렇다는 기록은 없지만, 기록이 침묵하는 틈에서 우리는 그렇게 상상해 볼 수도 있겠지.

어떤 위대한 남자 예술가일지라도 흰 눈으로 보게 되는 건, 내가 너무 많은 ‘악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거야. 죽고 나서도 미움만 받는 그들에게 한때 남자의 작품을 옆에서 도왔던 내 삶을 투영하지 않을 수 없고, 헌신적인 여자 없이 완성된 예술이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있을지 의심하게 돼.

여자로서 우리는 예술가의 아내들을 재평가해야 마땅해. 향안이, 소피아가, 콘스탄체가 해온 ‘맥락 노동’도 예술의 일부가 맞아.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은 그들이 피와 땀으로, 천재성과 탁월함으로 지어 올린 성채인걸. 그들은 시대적 한계와 차별 속에서 틈을 찾아 자기 기량을 최대한으로 펼친 여자들이야.

그러나 <월하의 마음>을 끝까지 다 읽은 후 나는 도무지 그런 재평가에 만족할 수 없어졌어. 평가는 후대에 가서 언제든 다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아무리 원한들 돌이킬 수 없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는 웹소설에 ‘회귀’라는 소재가 그렇게 흔한 이유일 거야.

나는 이제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게 된 것들이 궁금해. 예컨대, 향안이 모든 걸 알고서 회귀했다면, 다시 평생의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가 궁금해. 향안에게도 향안이 있었다면 향안이 무엇을 이뤘을지가 궁금해.

내게는 향안도 몰랐을 향안의 가능성이 보여. 향안은 한때 소설가를 꿈꿨어. 문학상에 낼 소설을 준비하면서, 수필을 써서 기고했지. 그의 문장은 잘 벼린 칼처럼 정갈하다가도 아름답게 번뜩여서, 나는 수도 없이 받아적었어. 향안은 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그 소설을 사랑했을 텐데. 그러나 남은 건 향안이 평생 쓴 조각글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이 책뿐이야.

향안은 김환기가 일찍 죽고 나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대. 향안의 일기에서는 자기 작품에 관한 소박한 애착이 느껴져. 김환기의 작품을 언급할 때의 웅대한 자부심과는 완전히 어조가 다르지.

“내 그림들을 침실에 걸었다. 어쩌면 내 그림이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내 마음같이 깨끗하다. 기분이 상쾌하다.” - <월하의 마음>, p. 181

화집을 내고 미술관을 짓느라 시간을 뺏기지 않았다면 향안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향안이 화가의 아내가 아니라, 화가였다면 말이야. 향안의 그림은 일생을 쏟았대도 김환기의 그림만큼 뛰어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게 꼭 향안의 손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향안보다도 더 향안의 편에 서서 묻게 돼.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써 그 질문에 답해야 할 거야. 그게 향안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우리가 궁금증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2022년 5월 29일,

네가 온전히 네 삶을 살기를 바라며, 혜담이.

추신 1.

여태 얼렁뚱땅 쉽게 만드는 레시피를 골라왔지만, 파리에서 지내던 시절 향안의 일기에서 이 구절을 발견한 순간 조금 어려워도 이 요리를 골라야겠다 싶었어.

“살라드 니이스와즈(파리서 니이스식 살라드라고 부르는)—즉 갖가지 신선한 야채를 고급 멸치젓과 서반아 고추와 올리이브 기름으로 무친 것을 우리나라 풋김치 맛을 연상하며 맛있게 먹다. 흰 포도주에 얼큰히 취하기도 하다.” - <월하의 마음>, p.101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의 이름을 딴 샐러드는 전에도 만들어 먹어본 적 있어. 그렇지만 앤초비를 “고급 멸치젓”으로, 카이옌 페퍼를 “서반아 고추”로 표기한 데다, 풋김치와 연결하다니 내가 아는 요리가 아닌 것만 같았어.

들어가는 야채는 다양하니까 아무거나 네게 있는 것들로 준비해도 좋아. 참치나 삶은 계란이나 삶은 감자를 넣으면 한 끼 식사로 든든할 거야.

특징적인 건 드레싱이지. 홍고추 한 개, 양파 1/8개, 마늘 3쪽, 앤초비 3마리를 최대한 잘게 다져. 그리고 올리브오일 반 컵과 식초 반 컵, 소금 세 꼬집과 설탕 세 꼬집을 잘 섞어 주면 돼.

푸짐하게 욕심껏 여러 재료를 넣은 니스식 샐러드는 과연 맛있었지만, 그리 풋김치를 연상시키지는 않았어. 한인마트도, 한류도 없었을 그때 샐러드에서라도 김치를 연상했을 향안을 기리며 한번 해 먹어보면 어때?

추신 2.

다음번 편지면 벌써 1년의 절반이더라구. 6월의 편지는 조금 특별하게 구독자들의 고민을 받아 답장을 써보면 어떨까 싶어졌어. 넌 요새 어떤 일 때문에 힘들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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