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여름이었다.’

이젠 놀림감이 되어버린 이 말을 들으면 너는 무엇이 생각나? 여름이라는 단어에서 흔히 떠올리는 것들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후끈한 공기, 차가운 유리병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방울, 젖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첨벙 뛰어드는 태도인 듯해. 주체할 수 없는 활기가 사방에 감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 여름은 늘 가장 무기력한 계절, 꼼짝할 수 없이 침대에 드러누워 듣는 창밖의 매미 소리야. 매미는 한 철이 지나가도록 온몸을 쥐어짜 악을 지르는데 나는 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든지.

이번 8월도 나는 거의 누워서 보낸 기분이야. 네게 보내는 이 편지를 쓰기 위해 대체 얼마 만에 책상 앞에 앉았는지 몰라.

"소진된 자들이 소진돼 보이는 이유는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아서다. 다름 아닌 그 안간힘 때문에 소진된 상태라 할지라도 말이다."

- <언다잉>, p.275

어쩌면 네가 나보다도 먼저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탈혼기>를 완성하고, 직접 출판사를 차려 출간하고, 텀블벅을 진행하고, 유통 체계를 꾸리면서 상반기를 정신없이 불태웠으니까, 완전히 소진되어 버린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주려나.

혹시 너도 나처럼 ‘번아웃’을 겪고 있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것 같아. 위에서 인용한 구절이 마치 네 이야기처럼 박혀 들었대도 말이야.

낯선 제목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소제목을 가진 <언다잉>은 집어 들기 쉬운 책은 아니야. 나도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믿고 읽을 수 있는 번역가 미래가 번역하지 않았더라면 엄두를 못 냈을 것 같아.

시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에 진단받은 후에 쓴 일종의 투병기라고 말하면 좀 더 가깝게 다가가겠지만, 그 말에 절대 다 담기지는 않는 기분이 들어. 고통, 취약성, 필멸성, 의학, 예술, 시간, 꿈, 데이터, 소진, 암, 돌봄… 이 책은 소제목이 나열한 주제 모두를 관통해 기어이 하나로 꿰는 서슬 퍼런 바늘 같은 작품이거든.

예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날 사로잡은 건 “자매의 죽음”을 언급한 서문이었어.

유방암을 이겨내는 엄마를 보면서 자랐으니 유방암이 낯설지는 않았어. 그렇지만 내게 친숙한 이름의 여자 작가들이 전부 유방암을 겪었는지는 몰랐어.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철 카슨, 참정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샬럿 퍼킨스 길먼… (찾아보니 여자는 36%가 살면서 한 번은 암을 겪는데, 그중 가장 흔한 게 유방암이래.)

손택은 “여자들은 다른 여자를 위해 죽지 않는다. ‘자매의’ 죽음 같은 것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언다잉>, p.16

그리고 수전 손택. 어찌나 많이 인용되는지 뇌리에 박혀버린 이름이 반갑기도 잠시, 눈을 찌푸리며 몇 번을 다시 읽었어. 그 손택이 정말 이런 말을 했다고? 그도 유방암에 걸려 죽었는데, 죽기 전 ‘여자와 죽음’이라는 제목을 붙일 뻔한 글을 구상했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고 해. 어쩌면 저 외로운 구절이 글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일지도.

"그러나 나는 손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매의 죽음이란 여자들이 다른 여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는 죽음이 아니라, 서로 유리된 상태에서 나란히 맞이하는 죽음에 가깝다. 자매의 죽음은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치르는 죽음이다."

-<언다잉>, p.16

내가 서툴게 반박에 나설 필요도 없이, 이렇게나 명료하고 담담한 책을 어떻게 계속 읽어나가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죽어 나간 자매들을 떠올려. 자매들은 강남 번화가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남자에게 맞아 죽기도 하고, 성착취 업소에 묶여 학대당하다 끝내 자기 손으로 숨을 끊기도 하지. 이번 여름 잔인한 폭우는 반지하방에 살던 자매와 그 딸을 우리에게서 앗아가기도 했잖아.

‘페미들에게 또 먹이 주겠네요.’

인터넷 기사에 흔히 출몰하는 남자들의 댓글과는 달리 그들 누구도 다른 여자를 위해 죽지는 않았어. 끝끝내 홀로, 여자라는 사실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 채로 죽었지. 모든 여자의 죽음이 자매의 죽음처럼 쓰라리게 느껴지는 이유야.

하지만 올여름 날 괴롭히는 건 죽음보다는 훨씬 사소한 문제지. <언다잉>의 소제목 중 하나가 ‘소진’이거든. 당시엔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부분이 이젠 간절해져서 나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어.

나의 번아웃은, 그리고 어쩌면 너의 번아웃은, 저자 앤 보이어가 지적한 대로 우리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이 시대 탓도 있을 거야.

“매시간이 생물학적 주기를 초월해 증폭되고, 15분이 한 시간의 효과를 발휘하고, 포모도로화되고(…) 시간 자체가 생산성을 갖추게 되는”(<언다잉>, p.272) 현시대가 소진을 부른다는 대목에서 찔리지 않을 수 없었지. 난 지금 이 편지조차 25분 업무와 5분 휴식을 반복하는 포모도로 타이머를 켜놓고 쓰고 있는걸.

적어도 8월 한 달은 마음껏 휴식을 취하자고 결심해놓고 알게 된 건 내가 제대로 쉬는 법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어.

강남역 사거리의 한 영어학원에 붙은 거대한 디지털시계를 본 적 있어? 나는 강남에 갈 일이 그리 많지 않은데, 10분의 1초까지 표시하며 쉴 틈 없이 숫자를 바꾸는 그 시계를 의식하지 않고는 거리를 지날 수 없던 게 기억나. 당장 이 순간에도 당신은 무언가를 잃고 있다, 바로 시간이라는 자원을, 시계는 그렇게 말하는듯했어.

이런 시대에 진정으로 쉴 수 있을까? 소파에 누워서 10초짜리 영상을 100개씩 보거나, 영원히 이어지는 SNS 피드를 쓸어내릴 수는 있겠지. 그러나 째깍거리는 머릿속 시계를 의식하지 않고서, 내 몸을 시간당 결괏값을 뱉어내야 할 기계로 여기지 않고서, 힘을 풀고 그저 존재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코로나로 격리되었던 동안 25권에 달하는 대하소설 <토지>를 집어 든 건 아마 그 시계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망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본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토지>는 2008년에 인쇄된 판이야. 고등학생 때 <토지>쯤은 읽어야 멋진 어른이 될 것 같은 기분에 엄마를 졸라 샀는데, 막상 매번 초반에서 가로막히곤 했어. 감옥에 가거나 무인도에 갇히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할 때면 거기에서야말로 꼭 <토지>를 읽겠다고 다짐했다니까?

내 삶에서 감옥이나 무인도와 그나마 가까운 게 격리 아니겠어?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서, 얼추 기억 나는 앞부분은 놔두고 5권부터 시작하는 2부의 이야기로 풍덩 빠져들었어.

<토지>는 정말 거대한 이야기야. (내 읽는 속도로는 편지를 쓰는 지금까지도 3부 2권까지밖에 못 왔어.) 시대로는 구한말부터 광복까지, 장소로는 경남 하동에서 간도 용정과 일본 동경까지, 수백 명의 삶이 교차하는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흐르는 강물 같아. 박완서 선생님도 같은 비유를 하셨더라구.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기도 하는 게, 마치 지류(支流)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 신동아 기사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에서 재인용

<토지>는 자꾸 나를 2022년으로 돌려보냈어. 한때 좋아했던 것들이 자석의 반대 극처럼 나를 튕겨내는 경험은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해보잖아. 물론 <토지>의 수많은 인물은 각자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만, 고등학생이던 나는 로맨스를 축으로 소설 속 세계에 정을 붙였거든.

몰락한 최참판댁의 마지막 자손으로 복수할 뜻을 품은 최서희는 수족 같은 머슴 길상이와 무슨 사이가 될까? 무당 딸이라고 괄시받는 월선이는 마을에서 가장 훤칠한 남자로 자란 소꿉친구 용이와 여러 장벽을 뛰어넘어 짝이 될 수 있을까? 그때는 그게 무엇보다 흥미진진했지.

“옛말에도 영에서 매 맞고 집에 와서 계집 친대더라.”

“네 놈이 계집이야! 계집이냐구! 하기야 쓴물 단물 다 빠진 늙은 쥐새끼 같은 놈이니까 계집보다 나을 것이 없지.”

- <토지> 제2부 4권 p.126

다시 편 <토지> 속에서는 냅다 뺨을 얻어맞는 듯 얼얼한 대사가 한 페이지 내내 이어지기도 했어. 2022년의 우리는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리 주요 인물도 아니고 딱히 선한 인물도 아닌 ‘민초’로 분류된 남자들이 술 한잔 걸치며 내뱉는 여성 비하는 소설 배경인 1910년대의 시대적 한계를 고증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박경리 선생님이 집필하시던 1970년대의 시대적 한계가 녹아든 걸까?

읽을수록 나는 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졌어. 한때 내가 호감을 품었던 길상이는 새끼 새 한 마리의 죽음에도 마음을 쓰지만, 여자를 착취하는 데는 거리낌 없어. 냉정히 생각해보면 용이는 세 여자의 삶을 뒤틀어 고통을 주면서도 자기 행동의 여파에는 무지한 가해자야. 소설 속 남자들은 선한 쪽이건 악한 쪽이건 여자를 깔고 뭉개기 여념이 없는데, 작가는 그들에게 보이는 연민을 여자들에게만은 쉽게 허락하지 않아.

‘...다 뒈져라! 다 뒈져! 김길상이 그 개새끼! 모두 개새끼다! 사내놈은 왜놈 나카지놈도 개새끼야. 모두 다아, 세상의 사내놈들 다아!’

- <토지> 제2부 4권 p.146

2부의 최대 악역이라 할 수 있는 김두수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송애는 가족과도 끊어지고 인생의 경로가 틀어져 버렸어. ‘카페’ 업소에서 오 년간 성착취를 당하고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송애는 속으로 사무치는 분노를 토해내. 그러나 전지적인 작가에게 송애는 “수치심 없는, 자포자기한, 세상을 우습게 보는, 뻔뻔스럽고 거칠고 배짱 하나 대단하여 교활하고 가학적인 한 여자”(p.143)일 뿐이지.

때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책을 내려놓지는 않았어. <토지>라는 맑고도 탁한 강을 따라 계속 흘러갔어. 박경리 선생님이 25년에 걸쳐 집필한 역작에는 어떤 아쉬움도 넘어서는 통찰이 있었으니까. (편지를 쓰며 알게 된 건데 선생님께서도 유방암 투병 중에 <토지> 집필을 이어나가셨대.)

페미니스트로서 느끼는 번아웃은 강남역의 거대한 시계가 부추기는 번아웃과는 조금 색깔이 다를 거야. 그리고 나는 양측으로 너덜너덜하게 소진된 기분이었지.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은 항상 다급함을 안고 있잖아. 지금이 아니면 안 되고,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싶지. 그것도 미지근한 마음으로는, 걷는 속도로는 부족해서 우리는 펄펄 끓고 풀악셀을 밟아. 그 정도로 절실하지 않다면 세상을 가득 메운 소음을 뚫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인지 운동은 불꽃에 비유되지만, 난 연료가 무한정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꺼지기 마련이라는 게 늘 신경이 쓰이곤 했어.

그때의 만세행렬이 눈앞을 지나간다.

“이 자식아! 고만 울어라!”

“오늘만요!”

상현은 소년같이 울었다.

“상현아!”

“으흐흐흐….”

“이 많은 사람들 속을 뒹굴고 싶구나! 밟혀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다!”

“우리 독립되는 날에 밟혀 죽읍시다!”

다시 읽는 <토지>에서 나는 어느새 우리 운동의 방향성을 찾고 있었어. 계급을 뒤엎으려는 동학농민운동과 일제 강점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비중 있게 펼쳐지고 있었지. 아니, 만세 운동의 감격을 읽으며 우리가 불타올랐던 여성 시위 현장을 떠올리지 않기도 어렵지 않아?

그러나 감격도 잠시, 눈물을 흘리던 상현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술독에 빠진 채야.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너무 달콤한 생각”(p.20)을 했다고 후회하지. 같이 만세를 불렀던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

그 역시 우리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지친 나머지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바뀐 걸까?

아까 자매의 죽음이 “서로 유리된 상태에서 나란히 맞이하는 죽음”이라고 했잖아. 그렇다면 자매의 번아웃 역시 비슷한 형태는 아닐지, 우리는 서로 유리된 상태에서 나란히 번아웃을 맞이하고 있는 건 아닐지… 매미의 울음소리를 베고 누워서, 실은 너무 두려웠어.

그렇지만 <토지>의 페이지를 넘기며, 또 네게 편지를 쓰며,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던 곳에서 서서히 샘솟는 힘을 느꼈어. 이상한 일이지? <토지>도 이 편지도 좌절과 실망, 소진과 분열로 가득 차 있는데 말이야.

그건 어느새 내가 거대한 강물의 속도를 담담히 내 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인지도 몰라. 화르륵 붙었던 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지지만, 우리는 강물의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지.

“토지는 원래 1부로 끝낼 요량이었지요. 그런데 5부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마흔여섯부터 지금까지니까, 스물네 해를 토지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거예요.”

- “삶에의 연민, 한의 미학”, <작가세계>, 1994년 가을

삶이 지속되는 한 멈추지 않을 그 강물 앞에서 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해. 읽고, 쓰고, 기억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고, 되도록 많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물길에 저항하면서도 그늘에서 쉬기도 하는 것.

봐, 어느새 공기에 찬 기운이 섞이고 있어.

2022년 8월 31일

8월보다 나은 9월을 믿는 혜담이.

추신 1.

예보를 보니 9월 초까지는 더위가 이어진대. 내 경험상 밤늦도록 친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책 속으로 도피하는 게 번아웃 탈출에 제일 효과가 좋았어. 그럴 때 시원하게 한잔 걸칠 수 있는 유자 하이볼 레시피를 알려줄게.

재료는 유자차를 타 먹는 유자청과 위스키, 탄산수와 얼음이 필요해. 유자청 대신 다른 상큼한 과일로 담근 청이 있다면 그걸 써도 잘 어울릴 거야.

위스키와 탄산수를 섞은 음료를 하이볼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위스키가 없다면 도수가 높은 증류수도 괜찮아. 위스키는 비싼 것이 아니라도 하이볼에는 충분히 잘 어울리더라구. (술을 못한다면 위스키를 빼고 에이드로 마시자!)

자, 만드는 법은 지나치게 쉬워서 민망할 정도야. 유리컵 밑바닥에 유자청 한 숟갈을 듬뿍 퍼서 넣고, 그 위에 위스키를 종이컵 1/5 정도 부어. 휘휘 섞은 다음 얼음을 쌓고 탄산수를 부으면 끝이거든.

유자의 상큼한 향과 위스키의 어두침침한 나무향 위에 피어나는 탄산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몰라. 네게도 번아웃을 훌훌 털어낼 힘이 솟아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