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엄마는 참 마음대로 안 돼, 그렇지?

아니, 들어 봐. 이번 달만 해도 그래. 방글라데시에서 일하는 아빠가 휴가를 받은 김에 엄마와 방콕에서 만난다길래 묵을 호텔을 실컷 찾아줬더니 엄마가 너무 비싸다고 퇴짜를 놓는 거야. 기껏 여행 가서 몇만 원 더 내는 게 어떻다고. 결국 간신히 더 싼 곳을 찾아줬잖아.

집수리를 해도 꼭 누구 안 시키고 혼자서, 엄마 몸이 축나는 방식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다가 물려주신 작은 집을 세를 놓으려고 손을 보는데 엄마 혼자 쓸고 닦고 타일까지 깔겠다는 거야. 사람 부르면 비싸다고.

엄마는 내가 6학년 때 유방암 수술을 받으면서 림프샘까지 떼어내서 좀만 힘들면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퉁퉁 붓는단 말이야. 근데 손을 덜 쓸 생각은 안 해. 자석파스니 파라핀 치료니 온갖 민간요법이 잘 듣는다는 얘기만 하지.

자매에게,

페미니즘을 알고 있으니까 당연히 엄마가 왜 그러는지 이론은 빤하지. 여자는 자신을 낮게 평가하도록 길러지고, 자기 노동에는 0원의 가격을 매기잖아. 내가 <탈혼기>에서 증명하려고 노력했듯이, 온갖 제도와 매체와 환경이 여자에게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들잖아.

그럼 뭐해, 책 속의 이론은 살아서 움직이는 엄마를 이길 수 없는데. 엄마는 끝내 거의 혼자서 집수리를 마쳤고, 손은 부어있어.

자매에게,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마음이 아슬아슬해지는 건 엄마가 내가 사는 집에 올 때야. 내가 미뤄놨던 설거지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방 청소를 엄마가 뚝딱해치워 버릴 때 나는 자꾸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 날 오래 괴롭혀온 어떤 질문이 내가 걸려 넘어지도록 발을 거는 것 같아.

그러니까,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하는 게 페미니스트일까, 아니면 엄마만 설거지하게 놔두는 게 페미니스트일까?

내가 이번 달 초 트위터에서 지켜본 공방은 거칠게는 이런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거야. 너는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해. 양쪽 다 일리가 있는데, 동시에 양쪽 다 틀린 것 같은 신기한 질문이지 않아?

페미니스트에게 엄마만큼 골치 아픈 존재도 없는 듯해. 가사노동이 여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벼락같은 깨달음 끝에 고개를 돌려보면 혼자서 설거지하는 엄마가 있지. 내가 아무리 남자 가족들의 버릇을 고쳐놓으려고 파업을 해봐도 엄마가 동참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야.

가부장제 안에서 오랜 세월 훈련된 엄마와 같은 일들을 하면 가사노동은 여자 일이라는 인식이 공고해질 뿐이고, 그렇다고 엄마가 혼자 하게 놔두면 나조차 엄마를 착취하는 꼴이 돼. 어느 쪽이건 남자만 좋은,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

"엄마의 사정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모른 척 엄마에게 기대기로 한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더. 실은 언제나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엄마에게 기댈 것을 알면서도, 남자를 채워 주기 위해 엄마를 영영 파먹을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 <탈혼기>, 유혜담, p.203

나는 결혼을 해 봤으니까 지레 더 민감해져. 일도 하며 돈도 벌고 집도 깨끗이 유지하고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야 하는 불가능한 목표가 내게 떨어졌을 때, 내가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 떠오르는 얼굴은 엄마였어. 엄마는 늘 기꺼이 도왔고, 때로는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나섰어. 남자의 손아귀에서 뭔가를 뺏으려면 피 터지는 싸움이 필요한 반면 엄마를 착취하는 건 무빙워크를 탄 듯 쉬웠지. 나는 아직도 그 죄책감을 다 떨어내지 못했어.

알아, 페미니스트는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고르는 게 아니라 잘못된 가정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 그 질문은 엄마와 나 둘 중 누가 더 손해인지를 따지지, 엄마와 내가 힘을 합쳐서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가능성이 빠져있잖아.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 중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이 충분했다고 느끼는 여성은 거의 없다…어머니의 힘은 너무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는 어머니를 통해서 일찍이 소녀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가르치는 구실을 한다.”

-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p.277

어쩌면 너는 네 엄마를 떠올리면서,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엄마는 어린 네 날개를 꺾었을지도, 가혹한 말을 네 안에 심어서 아무리 뽑아도 잡초처럼 되살아날지도, 너라면 하지 않았을 ‘멍청한’ 선택으로 네 삶까지 지옥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나기처럼 불쑥 찾아온 지난달 비정기 편지에서도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를 소개했었지. 원서는 1976년, 번역서는 1995년 출간됐지만, 내용만은 하나도 낡지 않은 탁월한 책이야. 페미니스트 시인이기도 한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자가 어머니가 된다는 복잡한 문제를 역사와 종교, 제도와 의학, 감정과 억압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해.

그중에서도 리치가 “책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p.245)이라고 부르는 건 9장 <어머니와 딸>이야. 여태 어떤 민감한 주제도 거리낌 없이 파고들던 리치조차 여기에 와서는 조금 망설이면서 심호흡을 하는 듯해.

“나의 어머니에 대하여 쓰기는 어렵다. 내가 무엇을 쓰든지, 그것은 내가 말하는 나의 이야기, 과거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만일 어머니 자신이 이야기를 한다면, 다른 배경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든 어머니가 말하든, 가슴 깊이 타오르는 오래되고 쌓인 분노의 조각이 나타날 것이다.”

-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p.248

내 시절 유행했던 수련회에서 토끼뜀, 오리걸음, 온갖 극기 체험을 종일 시킨 교관들은 밤에는 캠프파이어를 앞에 두고 엄마 이야기를 하곤 했어. 우리의 눈물을 뽑아낸 그때의 엄마 이야기란 무한한 애정과 희생의 이야기지, 분노는 어울리지 않지. 그러나 딸이 자기 엄마 이야기를 진실로 파고든다면, 먼지 속에서 아직도 뻘겋게 이글거리는 분노의 조각을 발견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 조각은 평생 가부장제에 짓눌린 엄마의 분노겠지만, 동시에 엄마의 짓눌린 자리에 맞닿은 내 분노이기도 해. 그러니 어떻게 딸과 엄마의 관계가 복잡하지 않을 수 있겠어.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계속 물려준다. 어머니의 자기혐오와 자기비하는 딸의 영혼을 묶는 속박의 띠이다.”

-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p.278

주변 여자들의 엄마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면, 나는 그래도 그나마 엄마와의 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편 같아. 리치의 말대로 엄마의 힘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엄마가 나에게 여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아예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구절에 와서는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고 지나갔었어.

나의 엄마 박혜서는 좀처럼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건 하는 일에 당당했고, 나의 모든 면을 자랑스러워하며 날 키웠어. 나는 한때 그런 엄마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평생을 지켜본 엄마의 태도가 내 안에서 우러나는 걸 느끼게 돼. 그건 아마 엄마가 내게 해준 수많은 일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유산일 거야.

그렇게 그저 스쳐 지나갔던 “물려준다”라는 단어를 되새기게 된 건, 이번 달 엄마가 쓴 글을 읽으면서였어.

엄마 글 하나 더 쓰고 있으니까 다 쓰면 보여줄게. 오전 10:38

엄마는 불쑥 그런 말을 꺼냈어. 내가 한창 <탈혼기>를 쓰고 있었을 때 엄마도 스무 살 때부터의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글을 한 편 썼었거든. 그건 “환갑이 넘도록 착취당하는지도 모르고 여태 오빠에게 내어주기만 한 엄마의 이야기”(<탈혼기>, p.298)였지.

엄마가 이번에 보여준 글은 더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이렇게 시작해.

“14살,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엄마는 집안 살림을 가르쳤다. 밥, 설거지, 된장찌개, 아버지가 좋아하는 수제비, 김치 담그기, 빨래하기, 심지어 이불 홑청 꿰매기까지.”

나는 엄마와 내 삶을 겹쳐보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에 능숙해지던 엄마와 나중에 크면 다 하니까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나는 둘 다 맏딸인 건 같았는데. 나는 이 나이까지 김치도 혼자 못 담그고 홑청이 뭔지도 제대로 몰라.

당시 고물상을 크게 하시던 할머니는 고물로 들어온 책을 전부 숨기곤 했대. 책을 좋아하던 엄마가 먼지 구덩이에 주저앉아 몇 시간씩 보내는 걸 막으려고. 반면 엄마는 내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책을 읽어주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볼 책에 드는 돈만은 아끼지 않았지. 엄마의 흐뭇한 시선에 무엇이 섞여 있는지 그땐 읽지 못했어.

딸에서 딸로 이어지는 기나긴 대물림의 고리를 엄마가 끊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물려준다는 말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그러나 우리가 반대의 방향으로 물려줄 수도 있을까? 내가 엄마에게 소중하게 간직할 무언가를 넘겨줄 수는 없는 걸까? 할머니에게 받은 상처만은 열네 살 때만큼 생생한 엄마에게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엄마들을 위한 페미니즘 책이 필요해.”

나의 가장 큰 지지자인 엄마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해. 보통은 딸을 키우면서도 답답한 소리를 하는 엄마 또래 여자들에 대해 투덜거리다가 나오는 말이지.

그러게, 정말 그런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몇 년간 내가 엄마와 나눴던 대화들이 어느새 조금씩 엄마 안에서 독자적으로 살아 숨 쉬는 걸 볼 때만큼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 없거든. 리치는 모든 여자가 서로에게 어머니이자 딸이자 자매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인지 그럴 때는 꼭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된 기분이 들어.

일단은 출판사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엄마의 말뜻은 내가 그런 책을 내보라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엄마들을 위한 페미니즘 책이 어떤 책일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거야.

시대와 국적을 막론해 모든 여자에게 적용되지만 딱딱한 감이 있는 이론서는 아닐 테고, 여자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언제나 특별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이번 달 15일에는 종각역에서 열린 여성부 폐지 반대 시위에 다녀왔어.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의 조직을 대신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거, 너도 들었지? 조직 개편은 반수 넘는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민주당이 개편안 발표 일주일 가까이 되어서야 폐지 반대 입장을 밝혀서 마음을 졸였었거든.

접이식 방석을 까먹고 안 가져온 나는 대오의 맨 끝으로 가서 아스팔트에 풀썩 주저앉았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여성은 임신출산 도구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쳤어.

혼자 참가한 내 눈에 들어온 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엄마 또래의 여자들이었어. 기성 여성 단체에서 주최한 시위라서 그런지 내가 여태 참석했던 여성 시위 중에서도 유독 나이대가 높았거든.

저분들은 누굴까?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성 운동을 해오신 건 아닐까? 나는 혼자 궁금해했어. 어쩌면 그분들이야말로 언젠가 ‘엄마들을 위한 페미니즘 책’을 써주실 적임자인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아직 나오지 않은 그 책 대신 엄마에게 보여주면 되겠다 싶은 영화를 찾았어. 바로 너도 어딘가에서 추천의 말을 읽었을지 모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야.

<에에올>은 뭐라 설명하기 참 어려운 영화야. 혼자 눈물을 주룩 흘리며 <에에올>을 보고 흥분에 차 동생 윤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도저히 제대로 전달을 못 하겠는 거야. 윤희의반응은 대충 이랬어. “뭐? 양자경이 세탁소를 하는데 세금을 안 내서 국세청에 갔다가 멀티버스에서 쿵푸를 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 줄거리 설명은 그만둘래. 영화가 아직 걸려있을 때 꼭 보라는 말만 하고 싶어. 혼란스럽고 현란한 난장판 속에서 내가 발견한 건 엄마의 삶, 그리고 그와 맞닿은 나의 삶이었거든.

“모든 거절과 모든 실망이 당신을 이 순간으로 이끌었다는 걸 기억해.”

- <에에올>, 웨이먼드 대사

영화를 보며 상상했어. 어딘가엔 우리 엄마 박혜서가 어린 시절부터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고 자란 우주가 있지 않을까? 결혼하는 대신 일에 전념하고, 나를 낳지도 않고, 그래서 나를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세상 말이야. 내가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엄마의 흘러간 가능성들이 손에 잡힐 듯 만져지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는 온갖 우주 중에서도 이 우주에 있잖아. 농담으로라도 가장 아름답다고는 못할, 못나고 서툴고 고통스러운 현재의 좌표에서,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서로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믿고 싶어.

끝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기서부터라도 다시 어디라도 갈 수 있을 테니까. 엄마가 내게 다른 세계를 열어줬듯, 나도 엄마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치만 잔뜩 기대하며 엄마랑 정말 <에에올>을 봤는데, 엄마는 영화가 어렵고 정신없었다고 했어. 엄마는 진짜 마음대로 안 돼, 그렇지?)

2022년 10월 31일

혜서의 딸, 유혜담

추신 1.

나와 살면서 엄마가 챙겨주는 밑반찬을 냉장고 한구석에 썩히고 있는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 엄마가 직접 담근 명이나물을 싸준 게 꼭 1년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멀쩡하고, 아직도 실컷 남았어. 그래서 진짜 간편하게 밑반찬을 소비하면서 한 끼 때울 수 있는 음식을 준비했어.

바로 밑반찬 오차즈케야. 말만 어렵지 찻물과 다시물에 밥을 말아먹는다고 생각하면 돼.

먼저 녹차 티백과 다시팩을 뜨거운 물에 3분 정도 우려둬. 녹차는 꼭 비싸고 좋은 찻잎일 필요 없이 흔한 현미녹차 티백도 잘 어울려.

녹차가 우러나는 동안 장아찌와 명란젓갈,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을 잘게 다지고 밥도 데우면 시간이 딱 맞아떨어질 거야.

밥 한 그릇 위에 밑반찬을 올리고 녹차국물을 부으면 끝, 정말 쉽지? 녹차 향과 함께 밑반찬의 다양한 식감이 아주 조화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