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에게,

이런 축 쳐지는 말로 편지를 시작해도 될까? 너에게 쓰는 편지도 벌써 11번째인데 나는 여전히 이 텅 빈 백지가 두려워.

"종이는 당신의 거울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 거울에 비친다."

-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대니 샤피로, p.14

자매에게,

물론 나는 종이가 아니라 흰 화면을 보고, 연필이 아니라 키보드를 두드리긴 해. 그렇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광활한 공백은 매번 같은 무게로 사람을 압도해.

그래서 나는 도망쳐. 나만 이런 게 아니라는 말을 들으려고 작법서를 읽고, 편지에 인용할 책을 읽으며 밑줄을 잔뜩 긋지. 장을 보러 가기도 하고, 본가에 다녀오기도 하고, 또 머리도 자르고…

더는 미룰 수 없을 때 자리에 앉아. 이젠 진짜 백지를 마주할 때야. 아, 그 전에 먼저 차를 우리고, 간식을 세팅하고, 유튜브에 들어가 배경 음악으로 틀 노래를 고르고…

나도 내가 참 웃겨.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자꾸 쓰려는 걸까? 글쓰기에 대체 무슨 마력이 있어서?

"여자가 쓴 세상의 거의 모든 글이 다시 읽으면 찢어지는 비명처럼 들린다. 우리는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서 글을 써야 했던 건 아닐까."

- <탈혼기>, 유혜담, p.115~116

자매에게,

그건 내가 여자라는 사실과 떼려야 뗄 수 없을 것 같아. 아, 물론 남자이면서도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가 존재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긴 알지. 그렇지만 내가 남자로 태어났대도 지금처럼 토해내고 싶은 불덩이를 품고 있었을지 자꾸 의심이 드는 거야.

이미 소나기 편지에서 소개하기도 했었지? 절판되어 엄청난 중고가에 팔리다 드디어 재출간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는 중이라 더더욱 나는 여자가 쓴다는 것의 의미에 사로잡혀 있거든.

백과사전보다도 두꺼운 1166쪽짜리 이 책은 19세기 영미권 여자 작가들과 그 작품을 분석한 문학비평서야. 너나 나나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쯤 들어봤을, 그러나 짐작컨대 딱히 끌리지는 않았을 <오만과 편견>이나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프랑켄슈타인> 같은 소설 말이야.

벌써 재미없다고? 그래서 그게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며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너는 어쩌면 조금 삐딱하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부터도 늘 그런 질문을 해왔거든.

자매에게,

문학이 다 무슨 의미일까? 글쎄,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을 거야.

그래서일까, 문학을 좋아해서 늘 문학 언저리에 머물면서도 나는 항상 더 ‘실용적’인 쪽을 선택해왔어. 영문학과 영어통번역 중에서는 그나마 쓸모 있는 통번역으로 대학원을 갔고, 책을 번역해도 여성 문학보다는 페미니즘 이론서를 번역했지.

페미니스트가 된 후에는 문학의 의미가 더욱 불투명하게 느껴졌어. 그러니까 여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에서 맞아 죽거나 착취 당하고 있는데, 문학은 그 앞에 무력하잖아. 차라리 짧고 명료한 ‘띵문’, 널리퍼지는 유머, 가려진 현실을 명명백백히 들추는 기사,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위면 몰라. 이야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운동을 빼고 난 나머지가 문학 같아요.”

나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어. 마치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나면 찌꺼기로 비지가 남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비지찌개를 참 좋아하지만 그건 내 취향일 뿐, 영양가는 두부에 다 있는 거지.

하지만 너도 비지찌개집에 가봤다면 그 벽에도 콩비지의 7가지 효능 따위가 적혀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이혼을 결심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읽어온 이야기들, 내가 써온 이야기들의 진정한 효능을 체감하게 되었어.

정확히는 ‘나쁜’ 이야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분노에 차서, 내가 대체 왜 이렇게 되었나 알기 위해 흙탕물 같은 인생을 되짚었을 때, 어떤 제도나 법률보다도 힘이 센 이야기들이 내 손에 잡혀들었거든.

"남성적 교양소설의 최종적인 목표가 성공적인 자아 발견이듯이, 여성 교육의 최종 산물은 불안한 자기 부정임을 브론테는 암시하고 있다. 캐서린, 혹은 모든 소녀들은 자기 이름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될 운명인지 알 수 없다는 것만을 배운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p.502

내가 한글을 떼고 처음으로 내 힘으로 읽은 책은 디즈니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어. 이야기 내내 깊은 잠에 빠져있는 공주는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될 운명인지 알지 못하지. 여러 저주와 가호로 둘러싸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왕자를 기다릴 뿐이야. 나는 그 이야기를 책등이 튿어질 때까지 읽었어.

대학 새내기 시절, 인터넷 여초 커뮤니티에서 배운대로 어설픈 화장을 하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잠재적 남자친구 후보로 관찰하던 나는 아마 그 이야기로부터 빚어졌을 거야.

아, 당연히 그 책뿐은 아니지.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와 웹툰, 소설과 에세이, 우리는 이야기에 둘러싸여 살잖아. 여자가 주체적으로 능력을 뽐내다가도 결국엔 남자와의 결혼에서 행복을 찾는 이야기들, 이름을 가진 여자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들, 여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하는 이야기들의 총합은 아주 조용히 나를 조종해왔어.

우리를 감염시키는 이 나쁜 이야기들을 묶어 어떤 이름으로 부른다면 ‘남성 서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성 서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그런 생각에 도달했어.

이번 달 28일에는 숙명대 문과대학에서 주최하는 페미니즘 문화제를 위해 강연을 다녀왔거든. 나는 어렴풋한 생각만 있는 상태에서 일단 막무가내로 강연 주제를 <여자, 이야기, 미래>라고 적어낸 후 고민을 시작했지.

좋은 여성서사는 무엇이며, 우리의 삶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나는 그 답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시간은 흐르고 점점 초조해지기만 했어.

"여성 문인이 숨기거나 가장하는 것은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따라서 ‘어떤 남자도 추측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감염과 질병을 치유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p.186~187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제목은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따온 거야. 주인공 제인 에어가 가정교사로 들어간 저택의 다락방에서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제인이 저택의 주인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는 동안, 밤중에는 유령이 나타나고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지.

그건 모두 다락방에 미친 여자가 갇혀 있기 때문이야. 바로 로체스터가 몰래 숨겨놓은 아내 버사지.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이전엔 사랑의 걸림돌로만 여겨졌던 버사를 다시 발견해. 버사는 제인의 어두운 분신과도 같다고 주장하는 거야. 제인의 억눌린 분노는 버사라는 모습으로 폭발하고, 제인의 은밀한 욕망은 버사의 손으로 실현되거든.

최근 들어 이 두꺼운 책만큼 페이지가 훌훌 넘어가는 책이 없었다면 믿어지겠어? 고리타분할 정도로 익숙한 이야기 틈에서 “비밀 이야기”(p.186)를 발견해나가는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두 저자의 공력은 정말 대단해.

“문학이란 여성의 일이” 아니라고(p.81) 믿어졌던 시대, 여자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겹겹이 숨긴 채 써야 했어. 괴물 이야기, 유령 이야기, 결혼 이야기라는 포장지 속에는 여자인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자”(p.187) 하는 몸부림이 있었지.

위대한 선배들이 그랬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몇 겹을 칠해본들 나의 이야기뿐일 거야.

그래서 나는 결국 내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어. 어떤 여성 서사가 좋은 서사인지가 아니라,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 어떤 여성 서사가 필요했는지를. 인류에게 이야기가 왜 쓸모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야기 덕분에 수렁에서 헤쳐나올 수 있었는지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문장을 보고 있으려니 입이 꽉 다물어지고, 머릿속은 막막하고, 더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강단 위에서 내가 대학 시절 썼던 단편 소설의 일부를 읽어주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에 사로잡혀서 고통 받는 사람의 이야기였지.

그래, 그 고통은 나의 고통이었어. 당시 추앙받던 남자 작가들은 “내 소설에는 여성이 거의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거나, 소설 속에서 여자를 강간한 후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라고 가래침을 뱉듯 서술했지. 그들의 남성 서사 속에서 여자인 나는 끝도 없이 작아져서, 꼭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어.

"…남자라는 종은 행복하여라!

펜으로 영향을 끼치고 남을 나무라는 운명으로 태어났으니

이득과 쾌락, 자유와 지배를 누리도록 태어났으니

반면에 우리는 마치 ‘영’이라는 숫자처럼

당신들의 숫자를 늘려주고 우리의 매력으로

당신들의 즐거움을 부풀려주기 위해 당신들 옆에 있나니."

- <다락방의 미친 여자>, p.81~82

나를 사로잡았던 문장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그때도 알았으면 좋았을 걸. 몇백 년 전에 쓰여진 이 시와 비교해 봐. 1631년에 영국에서 귀족으로 태어난 시인 앤 핀치는 여자라는 사실 외에는 나와 공통점이 없을 텐데도 이렇게 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 나의 고통은 결국 우리의 고통이었던 거야.

난 여자 작가들이 쓴 ‘비밀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했어. 오랫동안 자신을 남자 작가들을 보조하는 “편집자와 번역가”(p.779)로만 여겼던 조지 엘리엇을, “결혼하지 않은 채 위법적인 임신을 했던”(p.446) 메리 셸리를, “배고픔, 반항, 분노”(p.598)로 가득 찼던 샬럿 브론테를 같은 여자로서, 작가 선배로서 읽어냈어야 했어.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글쓰기를 그만 둔 시점은 첫 연애를 시작한 시기와 일치했어. 나는 내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직시하는 대신 결혼이라는 열차에 올라타 눈을 감았지. 때때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다락방은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 거야.

그렇지만 나를 구해준 것도 결국엔 이야기였어. 몇년 전 어느 타국의 밤하늘을 보면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떠올렸으니까.

내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어떨까? 내가 그 얘기를 쓰는 작가라면, 여자를 어디로 보내고 싶은 걸까?

여러분, 이야기는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어요.

여자를 가둘 수도 있고, 여자에게 이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믿게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여자를 탈출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는 새내기 때의 나보다 더 용감하고 굳센 얼굴들을 둘러보면서,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어. 질문을 떠올린 순간에 이야기를 많이 읽고 만들어 본 사람의 직감이 발동했고, 여자가 여기 머물 수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니까.

이게 이야기라면 주인공 여자는 떠나야만 했어. 어디로? 글쎄, 그때는 알 수 없었어.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지. 한 문장을 쓰면 다음 문장이 어떻게든 이어지고,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데서 출발해서 우리가 모르는 데로 나아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글쓰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잖아.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라. 정직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정직하라."

- <다락방의 미친 여자>, p. 248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은 한 편지에 그렇게 썼대. 우리가 작가여야 한다면, 적어도 우리 삶만은 우리 손으로 써나가야 한다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원칙처럼 보여.

그의 작품에서는 마차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등장해. 누구 마차를 타고 가느냐, 누가 무슨 마차를 샀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지. 그건 당시 마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을만큼 여자의 기동성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래. 작품의 중요한 장면이 전부 응접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오스틴이 주로 거기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고.

하지만 그럼에도 오스틴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갔고, 정직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정직했어. 로맨스 소설의 탈을 쓴 그의 소설은 당대 가부장제를 정조준해 고발했으니까. 지금 와서 오스틴의 이야기가 낡아 보인다면, 그건 오스틴의 한계가 곧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줬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이제 마차가 없어도 움직이지만, 여전히 여자에게는 수많은 제약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원칙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우리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말 먼 곳까지도 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렇게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내 이야기가 그 자리에 앉은 자매들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랐어. 그리고 편지를 읽는 너에게도.

하지만 내가 마이크를 놓자마자 냉큼 집어든 사회자 유빈은 나도 아직 어디에 도착한 건 아니라는 점을 빠르게 지적했지. 하하, 맞는 말이야. 나도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2022년 11월 30일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더 기대되는 혜담이.

추신 1.

이야기가 음식이라면 어떤 음식일까? 당연히 이야기마다 맛은 다르겠지만, 우리가 만드는 거대한 이야기라면 솥에서 영원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스튜가 떠올라.

중세 시대 여관에서는 거대한 솥에 온갖 재료를 넣어 끓인 스튜를 항상 불에 올려놓았대. 한 대접씩 덜어주고는 빈 만큼 재료를 추가하는 식이어서 영원불멸 스튜라고 불렸다고 하지. 온갖 재료의 맛이 푹 우러나고 어우러지는 이야기에 우리는 조금씩 기여하고 있는 지도 몰라.

영원히 끓일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엔 스튜가 잘 어울려. 재료는 뭐든 좋아. 토마토, 양배추, 감자, 양파, 마늘, 파프리카… 나는 냉장고에 있는 채소를 다 꺼냈어. 썰고 나니 도마가 가득 찼지.

나는 지방이 별로 없는 홍두깨살이 소고기 부위 중 제일 싸길래 사왔는데, 고기 없이도 충분히 맛있는 채소 스튜가 되니까 걱정 마.

가진 것 중 가장 큰 냄비를 달구고, 양파가 노르스름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길 때까지 참을성 있게 천천히 볶아. 그런 후엔 같은 팬에 소고기를 노릇노릇하게 사방을 익혀 줘.

남은 재료를 몽땅 때려넣고 잠길 정도로 물을 부으면, 이젠 기다림의 시간이야. 약불에서 보글보글 끓도록 놔두면 놔둘수록 맛있어진다니까?

30분 정도 지나 감자가 폭삭 익으면 먹어도 되긴 하지.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소고기다시다를 넣으면 깊은 맛이 더 잘 느껴질 거야. 하지만 한 그릇만 먹고, 다음 끼니에 또 끓이면서 재료를 추가하는 걸 추천해. 이건 항상 오늘보다 내일이 더 맛있는 요리니까.

연말에는 친구를 집에 초대할 일도 많잖아. 따끈한 빵을 스튜에 찍어먹으며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면 정말 완벽할 거야.